나, 펑더화이에 대하여 쓰다 - 마오쩌둥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혁명영웅이 반당집단의 수괴로 몰려 심문받으며 쓴 자술서
- 저자펑더화이
- 출판사앨피
- 출판일2020-03-30
- 등록일2020-06-12
보유 1, 대출 0,
예약 0, 누적대출 0, 누적예약 0
책소개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군사지도자 펑더화이 펑더화이 사망 4년 후인 1978년, 중국공산당은 펑더화이에게 씌워진 누명을 벗기고 정중하게 추도회를 거행했다. 당시 덩샤오핑은 추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원과 민중들이 모두 펑더화이 동지를 그리워하고 있다. … 그는 작전에는 용감했으며 어떤 곤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했으며 스스로 엄격하게 기율을 지켰다. 개인의 득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무거운 책임을 거리낌없이 맡았다.” 과연 펑더화이는 군사 업적 면에서 어느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탁월한 이력을 지닌 군사지도자이자 참군인으로 지금까지도 중국 인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명성과 중국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한국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을 이끌고 내려온 인물, 북진통일을 방해하고 1·4후퇴로 수많은 이산가족을 만든 장본인 정도가 우리가 아는 전부이다. 실제로 그는 한국전쟁 당시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으로 북한의 남일, 미국의 클라크와 함께 휴전협정에 조인한 당사자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참전은 그의 화려한 군사 업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그의 이름은 중국공산당사는 물론이고 중국 현대사에 넓고 깊게 새겨져 있다. 펑더화이라는 사람 펑더화이는 지금 중국에서 한창 선양되고 있다. 전기와 소설, 각종 일화집 등이 쏟아지고 있으며, 2년 전에는 CCTV에서 그의 일생을 드라마로 제작 방영하기도 했다. 드라마로 제작될 만큼 인간 펑더화이의 일생은 극적이었다. 비운의 혁명가 펑더화이는 소학교도 마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였고 먹고 살기 위해 병사가 되었다. 하지만 타고난 정의감과 용감함, 탁월한 군사 능력으로 ‘신중국 10대 원수’ 중 두 번째 반열에 올랐다. 주더가 경력과 상징성으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했다면, 펑더화이는 오로지 그의 능력과 실적, 선당후사의 헌신적인 태도를 인정받아 군부의 실력자가 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직설적이고 주위를 가리지 않는 성격 때문에 ‘항미원조의 영웅’은 ‘반당집단의 수괴’로 전락했다. 모든 것을 혁명에 바친 대가 중국 근현대사에서 펑더화이는 유방의 한신이나 유비의 관우, 송나라 충신 악비에 맞먹는 군사가이자 애국자로 평가받는다. 초강대국 미국을 비롯한 UN군과 싸워 승리한 인물이니 이러한 평가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그가 모든 것을 걸고 쟁취하려 한 사회는 그에게 처절한 절망만을 안겨 주었다. 문화대혁명 후 죽을 때까지 연금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암에 걸려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헤어진 아내를 만나게 해 달라는 소망도 이루지 못했다. 그가 부인 푸안슈와 억지로 이혼하면서 배를 두 쪽으로 잘라 나눠 먹은 이야기는 유명하다. 펑더화이는 어린 시절 함께 구걸하던 두 동생도 혁명에 바쳤다. 동생들은 고향인 후난에서 지하당 활동을 하다 국민당 특무에 잡혀가 처참한 고문을 당한 뒤 살해당했다. 펑더화이 본인도 사후 ‘왕촨’이라는 이름으로 화장을 당했다. 일생토록 마오쩌둥과 함께 군벌, 일본 군대,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에 맞서 남들이 가장 꺼리는 임무를 도맡아 완수한 혁명가의 말로는 그렇게 비참했다.
저자소개
중국 후난성湖南省 샹탄현湘潭縣 출생. 호남군 강무당講武堂을 졸업하고 국민혁명에 참가하였다. 1928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고 핑장봉기를 일으켜 공농홍군 5군을 조직하였다. 1934∼1935년 장정에 참가하였으며 1936년 제1방면군 사령이 되었다. 항일전쟁 시기 주더朱德 밑에서 부총사령을 지냈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 서북인민해방군 사령을 거쳐 신중국 정부 수립 후 중앙인민정부위원회 부주석·서북군정위원회 주석 등을 맡았다. 1950년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고, 1954년 이후 국방위원회 부주석·국무원 부총리·국방부장·당중앙정치국원 등을 역임하며 군의 근대화를 추진하였으며, 1955년 원수가 되었다. 1959년 마오쩌둥毛澤東이 추진하던 대약진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국방부장에서 해임되고 모든 공직을 빼앗겼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홍위병의 공격 대상이 되어 폭행과 조리돌림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1974년 암으로 베이징에서 사망하였다. 1978년 마오 쩌둥 사후 중국공산당 제11차 중앙군사위원회에서 사면을 받고 명예를 회복했다.
목차
일러두기 옮긴이 서문 제1장. 어린 시절, 소년기의 처지 (1898~1916) 제2장. 상군 湘軍 의 병사가 되다 (1916년 3월~1921년 가을) 제3장. 빈민구제에 뜻을 세우다 (1921년 가을~1925년) 제4장. 중국공산당을 찾다 (1926~1928년 4월) 제5장. 핑장기의 (1928년 봄~1928년 7월) 제6장. 징강산으로 가다 (1928년 8월~1929년 7월) 제7장. 다시 상악감 변구로 돌아오다 (1929년 8월~1930년 6월) 제8장. 창사를 치다 (1930년 6월~1930년 9월) 제9장. 제1차에서 제4차 반포위토벌 투쟁 (1930년 9월~1933년 2월) 제10장. 5차 반포위토벌 전후 점차 왕밍노선을 인식하다 (1931년 11월~1934년 9월) 제11장. 장정長征부터 3대 주력이 합류하기까지 (1934년 10월~1936년 12월) 제12장. 항일전쟁 (1937년 7월~1945년 8월) 제13장. 해방전쟁 (1946년~1947년 10월) 제14장. 미국에 맞서 조선을 지원하다 (1950년 10월~1953년 7월) 제15장. 루산회의 전후 (1959년) 부록 1 부록 2 옮긴이 후기 ■ 펑더화이 연표 ■ 주요 등장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