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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 뒤마의 프랑스사 산책 - 삼총사의 작가와 함께 2천 년 프랑스 역사를 걷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프랑스사 산책 - 삼총사의 작가와 함께 2천 년 프랑스 역사를 걷다
  • 저자알렉상드르 뒤마
  • 출판사옥당북스
  • 출판일2019-05-31
  • 등록일2019-07-18
보유 2, 대출 0, 예약 0, 누적대출 1, 누적예약 0

책소개

· 갈리아의 주인은 어쩌다 프랑크족의 노예로 전락했을까? · 유럽 중세 시대 때 ‘봉건제도’는 왜 시작되었을까? · 유럽의 약탈자 노르만족은 어떻게 프랑스인의 조상이 되었을까? …… 역사소설의 대가, 파란만장한 프랑스사를 한 권에 담다! 루이 13세 시대를 배경으로 검객 다르타냥과 근위병 삼총사의 무용담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 《삼총사》는 책을 뛰어넘어 수차례 영화와 만화로 각색된 대표적인 역사소설이다. 그리고 이 책을 쓴 알렉상드르 뒤마는 자칫 딱딱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생기를 불어넣어 독자를 사로잡는 데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는 1829년 희곡 〈앙리 3세와 그의 궁정〉을 무대에 올려 프랑스를 대표하는 극작가로 급부상했을 때부터 1870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주로 역사를 종횡무진 누비며 작품 활동을 했다. 그는 250여 편의 작품을 남겼는데, 통사로 집필한 정통 역사서는 이번에 출간된《알렉상드르 뒤마의 프랑스사 산책(Gaul et France)》이 유일하다. 소위 잘나가는 작가 뒤마가 역사서를 집필한 데에는 개인사와 얽힌 당시 시대 상황이 큰 영향을 미쳤다. 뒤마의 아버지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 나폴레옹 휘하에서 장군으로 활약하였지만 뒤마가 태어난 후 4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뒤마는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 독학으로 글쓰기 능력을 길렀고, 성인이 된 후 오를레앙의 공작 루이 필리프의 가문에서 문서 업무를 맡아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 이후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는데, 뒤마가 극작가로 주목받던 1830년 그의 고용주였던 루이 필리프가 ‘시민왕’이란 별칭과 함께 프랑스 왕좌에 오르는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다. 시대를 역행하여 극단적인 반동정치를 일삼은 샤를 10세를 성난 민중이 다시 한 번 끌어내린 7월 혁명의 결과였다. 이 같은 역사적 변화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뒤마는 자연스레 왕의 운명마저 좌우하는 민중권력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런 관심이 프랑스 민족의 형성과 민중권력의 탄생 과정을 되짚어보는 역사서 집필로 그를 이끌어 《알렉상드르 뒤마의 프랑스사 산책》이란 결실로 이어졌다. 오늘날의 서유럽을 만든 프랑스 중세시대 19세기 격동의 역사 한복판에 선 뒤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지역을 정복한 시기부터 시민왕 루이 필리프 1세의 시대까지 근 2,000년의 역사를 다룬다. 그중에서 저자가 특히 주목한 시기는 오늘날의 프랑스 지역에 최초의 왕국을 세운 5세기 메로빙거 왕조의 개창부터 14세기 카페 왕조의 몰락까지이다. 뒤마가 유독 중세 프랑스 역사에 집중한 이유는 이 시기에 프랑스라는 국가의 근간이 제 모습을 갖추고, 이민족의 지배 아래 노예 상태였던 프랑스인의 조상이 갈리아 지역의 주인으로서 스스로를 자각해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역사는 갈리아 지역에 문명을 전파한 로마제국의 몰락에서부터 시작된다. 395년 “한 사람이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광대했던 로마제국은 죽어가는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고”(19쪽),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갈라진다. 로마제국이 총독을 두어 통치하던 갈리아 지역은 서로마제국에 속했지만 반쪽짜리 제국의 영향력은 예전만 못했고, 이 틈을 비집고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이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오늘날 벨기에와 프랑스의 국경 근방의 도시 투르네(Tournai)에 터를 잡은 프랑크족은 갈리아에 난립한 여러 게르만족을 정복하며 세력을 키워갔고 클로비스 1세 때 동로마제국 황제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바로 이 무렵부터 프랑크족 통치자의 명칭이 족장에서 왕으로 바뀌었다. 갈리아에 최초의 왕국이 들어서고 첫 번째 왕조가 닻을 올린 것이다. 하지만 갈리아를 차지한 프랑크족과 그들의 왕국은 태평성대와는 거리가 먼 역사를 써내려간다. 프랑크족에게는 유산을 골고루 나누어 갖는 관습이 있었는데, 왕국의 영토도 마찬가지였다. 선대왕이 확장한 영토는 후손들의 손에 넘어가며 조각 났고, 형제들은 더 많은 땅을 차지하고자 서로 전쟁과 암살에 몰두하였다. 이 과정에서 왕들은 장군들의 지지를 얻고자 정복한 영토의 일부를 주고 충성을 샀고, 영토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약해진 왕좌를 유지하기 위해 영토 일부를 줘야 했다. 이것이 통합과 분할의 악순환이 뿌린 초기 봉건제의 씨앗이었다. 국가의 이익도 민중의 삶도 뒷전인 프랑크 왕국의 혼란은 카롤링거 왕조가 들어선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샤를마뉴(독일에서는 ‘카를 대제’)가 서유럽을 정복하고 오늘날의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영토 대부분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지만, 후대가 벌인 수차례의 전쟁 끝에 샤를마뉴의 프랑크 제국은 셋으로 나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843년 베르? 조약과 870년 메이르선 조약). 1부와 2부에서 메로빙거 왕조와 카롤링거 왕조의 역사를 풀어놓은 뒤마는 3부와 4부에서 카페 왕조의 통치 아래 프랑스라는 국가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과 프랑스가 유럽의 강자로 부상하며 겪는 성장통을 다양한 사건과 인물을 통해 흥미롭게 보여준다. 이 시기는 중세 시대를 상징하는 ‘십자군 원정’, 프랑스 발전의 초석을 다진 ‘부빈 전투’ 등 대내외적으로 굵직한 사건들이 벌어지는데, 뒤마는 작가 특유의 생생한 필치로 사건들을 생생하게 재현할 뿐 아니라 복잡하게 뒤얽힌 유럽 각국의 이해관계 아래 입체적으로 조망하여 프랑스와 서유럽의 역사를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예루살렘의 거점 도시에서 벌어진 아크레 전투) “시간이 지나면서 기사들의 무기는 떨어져갔고 행운 또한 비켜가고 있었다. 군인이자 수도사인 기사들은 한 명씩 서로에게 죄를 고백한 뒤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며 죽음을 맞았다. … 사라센인들은 도시를 완전히 파괴했다. 성곽과 탑, 교회와 주택이 모두 무너졌다. 총대주교와 자선 기사단의 총장은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리며 몇몇 생존자의 도움을 받아 배에 올랐다. 그들은 시칠리아나 다른 섬에 닿기를 바랐지만 결국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296쪽) (부빈 전투에서의) “승리는 완벽했으며 그 결과가 지닌 중요성은 어마어마했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정복자로서 다스리고 소유했던 프랑스에 대해 영향력을 회복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희망은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당시 푸아투에 와있던 잉글랜드 왕 존 또한 필리프 2세와 5년간의 휴전 협정을 맺었다.”(273쪽) 프랑스의 토대를 다진 세 왕조의 역사를 생생하게 살핀 후, 뒤마는 에필로그에서 발루아 왕조부터 19세기 초반까지의 프랑스 역사를 핵심만 간추려 살피며 앞선 왕조의 유산을 물려받아 각 왕조가 프랑스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를 짚는다. 그리고 앞으로 진행될 역사의 방향을 제시하며 2,000년의 역사 산책을 마무리한다. 노예에서 주권자로, 자유를 위해 싸운 프랑스 민중의 역사 이 책에서 뒤마는 프랑스를 통치했던 왕조들을 중심축에 두고 역사를 되돌아본다. 그렇다고 권력의 향배에 역사 서술의 초점을 맞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권력의 변천과 더불어 각 시대를 산 민중의 처지가 어떠했는지를 살펴, 노예 신분에서 권력의 한 주역으로 성장해가는 민중세계의 변화도 놓치지 않는다. 로마가 통치하던 시기의 갈리아 원주민은 로마 시민이었다. 이들은 로마 시민의 명예를 갖게 된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로마군단에 들어가 브리타니아를 로마제국에 편입시키는 데 앞장섰다. “이건 마치 인도의 왕이 잡아서 길들인 코끼리들이 왕을 도와 다른 야생 코끼리 포획에 나서는 것과도 같았다.”(332쪽) 하지만 로마가 물러나고 갈리아를 차지한 프랑크족 아래에서 갈리아 원주민은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클로비스가 갈리아 지역을 다스릴 당시 상황을 살펴볼 때 눈에 띄는 것은 정복자 왕과 정복자 장군, 정복자 군대뿐이다. 피정복민은 국민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했다. 단지 노예에 불과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민중은 주인이 사망한 후 땅과 함께 상속되었고, 상속자에게는 이들을 내다 팔거나 무상 양도하거나 죽일 권리가 있었다. “최초의 왕조인 메로빙거 왕조의 민중에 대해 고대의 역사학자들이 그토록 침묵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80쪽) 프랑스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 피지배계층이 역사의 전면에 극적으로 재등장하는 것은 프랑크족이 갈리아에 터를 잡은 때로부터 약 600여 년이 지난 후였다. 957년 캉브레의 민중은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행동에 옮겼다. 바로 자치권을 지닌 최초의 코뮌 설립이다. 12세기의 수도사이자 역사가였던 기베르 드 노장(Guibert de Nogent)은 거룩한 분노를 드러내며 코뮌을 이렇게 정의했다. “이 새롭고 형편없는 단어의 의미는 농노들이 1년에 한 번 빼고는 그들의 주인에게 더 이상 소작료를 내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위법 행위를 저질렀을 때라도 법으로 정해진 벌금만 내면 사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88쪽) 기베르 드 노장의 분노 섞인 반응에서 유추할 수 있듯 당시 지배층은 코뮌 설립을 요구하는 피지배층에게 잔혹한 탄압으로 답을 했다. 하지만 자유를 향한 캉브레 주민의 열망은 사그라들 줄 몰랐고, 결국 네 번의 시도 끝에 코뮌을 인정받았다. 캉브레 코뮌은 다른 도시들의 본보기가 되었고, 프랑스 여러 도시에서 코뮌이 설립되었다. 200여 년이 흐른 필리프 2세 때는 “파리 주변에… 독립한 코뮌들이 띠를 이루었”고, 그 후로도 “민중 해방을 향한 행진은 최종 목표인 자유를 획득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열망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18세기에 프랑스 대혁명으로 폭발하였다. 오늘날 프랑스가 대표하는 자유와 평등의 씨앗은 이미 중세 시대 때 발아한 것이었고, 뒤마가 중세 프랑스 역사에 보다 큰 관심을 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뒤마, 프랑스 역사의 흐릿한 페이지에 생기를 불어넣다! 프랑스 대혁명의 열기가 남아 있던 시기에 쓰여진 《알렉상드르 뒤마의 프랑스사 산책》은 프랑스라는 국가 정체성과 프랑스 민중의 자유를 향한 열망의 기원을 찾아 떠난 근 2,000년의 시간 탐험이다. 하지만 서유럽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지리적 조건 때문에 프랑스에서 벌어진 일들은 비단 프랑스에 국한된 역사가 아니다. 800년, 서유럽을 재패하며 프랑크 제국을 건설한 샤를마뉴에게 476년에 이미 멸망한 서로마제국 황제의 관이 수여되고, 샤를마뉴의 서로마제국 전통을 독일이 신성로마제국으로 잇는 등 유럽은 종교와 역사를 서로 공유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프랑스 역사, 특히 우리에게 조금 낯설 수 있는 중세 프랑스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프랑스를 넘어 유럽의 역사를 읽는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생동감 있는 필체로 프랑스와 유럽 역사의 흐릿한 페이지를 생생하게 만남으로써 프랑스는 물론 유럽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저자소개

1802년 북프랑스 엔 현의 빌레르코트레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나폴레옹 군의 장군이었던 아버지가 죽자, 그는 생계를 위해 파리로 가서 오를레앙 공작 가문에서 서류를 작성하는 일을 했다. 하지만 뒤마는 곧 연극계에 매력을 느껴 희곡 창작을 시작하고, 사극 『앙리 3세와 그 궁정』(1829)이 대성공을 거두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그 후 소설 『삼총사』(1844)를 써서 대호평을 받았으며, 그 후속편인 『20년 후』(1845)와 『철가면』(1848), 『몽테크리스토 백작』 외 무려 250편이 넘는 작품을 썼다

목차

저자소개 옮긴이의 글 프롤로그 1부 | 프랑크 왕국의 탄생 2부 | 프랑크 왕국의 흥망성쇠 3부 | 프랑크 왕국을 넘어 프랑스 왕국으로 4부 | 서유럽의 강자로 부상하는 프랑스 에필로그 부록 § 프랑스 왕실 가계도 §